기사승인 : 2026-02-06 12:51 기자 : 편집부
주말에 대청소를 하다 검정 비닐봉지 하나를 끌어냈다. 버리려다 말았던 물건들이 섞여 있는 봉지였다. 그 안에서 낡은 카드 몇 장이 손에 걸렸다. 하나를 펼치자 접혀 있던 종이 사이에서 베트남의 건축물과 관광지가 솟아올랐다. 탑이 서고, 다리가 놓이고, 작은 섬이 나타났다.

옆에서 아이도 따라 카드를 펼쳤다. “엄마, 이거 봐.” 그 순간, 카드 위에 호안끼엠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는 입체 카드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우리 여기 자주 갔던 곳이잖아.”
베트남에서 ‘나라’를 뜻하는 말은 Nhà nước이다. ‘물의 집’이라는 뜻을 처음 들었을 때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베트남의 대표적인 메콩강, 홍강, 그리고 도시에 흩어진 수많은 호수들은 이 나라에서 생활의 밑거름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하노이란 이름 역시 ‘강 안의 도시’라는 뜻으로, 도심을 걷다 보면 크고 작은 호수를 만나는 일은 흔하다. 하노이 도심에만 120여 개, 도시 외곽에는 약 1,000여개의 호수와 연못이 있을 정도라니 세계 어느 수도가 이토록 많은 물을 품고 있을까 싶다.
우리 가족이 하노이에 살던 때, 가장 자주 찾은 곳은 호안끼엠이었다. 이곳은 미로처럼 짜여진 상점부터 수상인형극 극장, 맥주 거리까지 갖춰진 하노이 최대의 번화가다. 낮에는 관광객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호수를 돌고, 해가 기울면 운동복 차림의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호숫가에는 결혼식 사진을 찍는 커플뿐만 아니라 아오자이를 입은 여성들도 자주 목격된다. 바람결에 옷자락이 흔들리고,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웃음도 뒤섞인다.
호안끼엠은 ‘검을 돌려준 호수’라는 뜻이다.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신비한 거북에게 검을 받았고, 전쟁이 끝난 뒤 다시 돌려주었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호수 한가운데 위치한 응옥선 사당 안의 작은 거북이 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곳은 신화와 현실이 공존하는 신비로운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말이면 호수로 통하는 메인 도로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버스가 사라지는 날이다. 아이의 손을 잡고 광장으로 들어서면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린다. 조금 더 걷다 보면 대학생들이 원을 만들고 서 있다. 대나무 막대가 바닥을 친다. “땁!” “땁!” 박자에 맞춰 뛰어넘는 대나무 고무줄 놀이로 베트남의 전통 놀이다. 아이는 규칙을 몰라도 기꺼이 뛰어든다. 박자를 놓치면 서로 웃고, 넘어질 뻔하면 옆에서 잡아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나무 블록으로 집을 짓고 있었다. 처음 보는 아이들끼리였지만 금세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블록을 나누고 쌓는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괜찮다. 서툼조차 환영받고, 잘하려는 사람보다 함께 있으려는 사람을 환영해주는 곳이 바로 주말의 호안끼엠이기 때문이다.
하노이에는 또 다른 호수가 있다. 서호는 호안끼엠보다 훨씬 크고, 훨씬 조용하다. 관광객보다는 운동화 끈을 조이는 사람,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 하원한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부모가 더 많아 일상과 맞닿아있는 호수이다. 커피 한잔을 들고 아무 말 없이 물을 바라보는 사람도 많다.
전꾸옥 사원은 6세기에 세워진 하노이에서 가장 오래된 불탑으로 호수 중앙에 점처럼 박혀 있다. 작은 섬 위에 서 있는 그 절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왠지 편안해진다. 그 풍경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국의 한강이 떠오른다.
한강 잠수교에서 열리는 ‘뚜벅뚜벅 축제’처럼, 차가 빠지고 사람의 발걸음이 허락되는 날의 풍경 말이다. 산책로가 된 한강 다리 위에서 사람들은 물 위를 걷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무지개 분수와 잔잔한 조명으로 하루의 끝을 정리하기 좋은 반포대교, 뚝섬에서 광진교 쪽으로 이어지는 수변 산책로, 한강중에서도 물 가까이 내려갈 수 있는 뚝섬 한강 공원은 시민들에게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볼거리가 아닌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아이들은 자전거를 끌고 나와 다리 위를 달리고, 강을 내려다보며 “여기서 놀아도 돼?” 라고묻는다. 어른들은 그제야 걷던 속도를 늦추고 말없이 난간에 기대거나, 간간이 사진을 찍는다.
주말에 차를 비우는 결정, 작은 의자를 놓는 선택, 함께하는 놀이에서 아이가 서툴러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여유, 이 모든 풍경들이 모여 도시와 사람들은 비로소 같이 숨을 쉰다.
돗자리 하나와 간단한 간식, 아이의 자전거. 별다른 계획이 없어도 물가에 앉아 있으면 하루의 속도는 자연스레 늦춰진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 날이 풀리면 가족과 함께 한강으로 향할 생각이다. 베트남의 호수에서 가져온 여유를 품고, 일상이 조금은 달라지는 순간을 다시 만나러 말이다.
/글·사진 ⓒ 이주영, (전)sbs 미디어 비평 작가, (현)화성시 미디어센터 강사, 한국문학예술원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