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승인 : 2026-01-28 14:30 기자 : 편집부
미국 대학가의 한국어 강의실 풍경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특정 지역 언어’로 분류되던 한국어가 이제는 수강 신청 경쟁이 벌어지는 과목이 됐습니다. 2009년부터 2016년까지 미국 대학에서 한국어 수업 등록자는 약 78% 증가해 1만5천 명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같은 기간 프랑스어와 독일어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외국어 수업 등록이 정체되거나 감소한 흐름과 비교하면, 이 변화는 더욱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이 숫자 앞에서 이제 한류는 더 이상 ‘보는 문화’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럼 한국어는 왜, 이토록 빠르게 선택받고 있을까요?

답은 비교적 일상적인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노래를 흥얼거리다 가사를 궁금해하고, 드라마를 보다가 자막보다 말의 의미를 직접 알고 싶어하는 동기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시작된 호기심은 어느 순간 강의실로 이어집니다. 문법을 배우고, 발음을 익히고, 한국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한류는 더 이상 ‘보는 문화’에 머물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은 배우고 싶은 이유가 되고, 취향은 학습의 동력이 됩니다.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의 2025년 해외한류실태조사에 따르면, 28개국 해외 한류 소비자들은 월 평균 14시간 이상 한국 콘텐츠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시간이 단순한 소비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콘텐츠를 반복적으로 접할수록 한국어는 ‘있으면 좋은 언어’가 아니라 ‘배워야 할 언어’로 인식됩니다. 한류 소비가 학습으로 옮겨가는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지금의 흐름을 단순한 문화 유행이 아닌 교육 한류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합니다.
이 변화를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BTS를 매개로 한 한국어 강좌입니다. 한국국제교류재단과 한국외국어대학교, 에듀테크 기업이 협업해 만든 Learn! Korean with BTS는 팬덤의 관심을 제도권 교육으로 연결한 대표적인 모델입니다. 이 강좌는 외교부가 선정한 공공외교 우수사례로 꼽혔고, 2022년 기준 13개국 16개 대학에서 52개 강좌가 개설돼 약 1,200명의 학생이 실제로 수업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이 프로그램이 온라인 콘텐츠로 소비되는 데 그치지 않고, 해외 대학의 정규 교과과정 안으로 편입됐다는 사실입니다.
이 강좌의 의미는 숫자보다 과정에 있습니다. 팬이었던 학생은 학습자가 되고, 학습자는 교환학생과 유학을 고민하며, 때로는 한국학 전공을 선택합니다. 이 과정에서 BTS는 단순한 스타가 아니라 학습의 출발점이자 연결 고리가 됩니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학습의 정당한 이유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문화와 교육, 공공외교는 자연스럽게 맞물립니다.
해외 대학 현장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미국 콜로라도의 MSU Denver를 비롯한 여러 캠퍼스에서는 K팝과 K드라마의 인기로 한국어 수업 수요가 급증했고, 새로운 과목이 잇따라 개설됐습니다. 교수와 국제교류 담당자들은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콘텐츠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언어 학습을 시작하게 만들고, 그 선택이 진로와 학문적 방향까지 바꾼다”고 말입니다. 한류는 이제 학생들의 여가 취향이 아니라, 교육 경로를 재편하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정책 역시 이 변화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세종학당 확장과 KF e-스쿨 확대 등 정부의 한국어 세계화 정책은 K팝과 K드라마의 인기에 실질적으로 기대어 성장해왔습니다. 전 세계 87개국 252개소로 확장된 세종학당 네트워크에는 2024년 한 해에만 21만 명이 넘는 학습자가 모였습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수강 대기자가 생길 만큼 수요가 높습니다. 한류는 더 이상 정책의 보조 장치가 아니라, 언어와 인재 정책을 움직이는 중심축이 되고 있습니다.
이 흐름은 대학과 성인 학습자에 머물지 않습니다. 해외 초·중등 교육 현장에서도 한국어는 점차 ‘선택 가능한 언어’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국제한국어교육재단은 유럽공통참조기준(CEFR)을 준용해 해외 초·중등 현지 교육과정에 맞춘 한국어 교재를 개발하며, 그 안에 한국 문화와 한류 콘텐츠를 자연스럽게 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어린 학생들에게 한국어는 낯선 외국어가 아니라,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는 언어로 소개됩니다. 교육 한류는 특정 세대의 취향을 넘어 장기적인 학습 경로로 설계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과제는 한류를 교육에 활용할 것인가의 여부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어떤 원칙 아래에서 이 흐름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어갈 것인가에 있습니다. 해외 교육 현장에서 나타난 변화는 이미 그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 움직임을 성급한 성과로 환원하기보다, 교육과 문화가 장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구조로 차분히 다듬어가는 일일 것입니다. BTS를 따라 한국어를 배우는 강의실의 풍경은, 오늘날 교육 한류가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장면입니다.
/ 위드온 글로벌 브릿지 하지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