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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미 세계여행] 입체적 도시 경험, 룩셈부르크 여정

기사승인 : 2026-01-12 13:24 기자 : 편집부

룩셈부르크는 외부의 힘에 둘러싸여 살아온 국가다. 절벽 위에 도시를 세우고, 방어를 공간의 원칙으로 삼아온 흔적이 지금도 거리 곳곳에 남아 있다. 수도는 중세의 성벽 위에 금융과 사법 기능이 얹힌 구조를 유지하며, 작은 도시 안에 다양한 시간이 공존한다.

유럽사법재판소 등 국제기구와 세계적 금융기관들이 모여 있는 이 도시는 규모보다 정돈의 방식으로 이해되는 곳이다. 과잉 없이 계획된 동선, 불필요한 장치 없이 연결된 거리들은 여행자를 안내보다 관찰로 이끈다.

나는 상부 도심에서 광장을 지나, 자연스럽게 아래 계곡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선택했다. 지도에서는 고저차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중간중간 이어지는 오르막 덕분에 걸을 때마다 시야가 달라졌고, 도시 풍경도 그때마다 색다르게 다가왔다.

위에서는 행정 도시처럼 정돈되어 있었던 풍경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중세 성벽과 나무들이 교차하며 또 다른 시대를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트램 소리와 교회의 종소리가 서로 다른 높이에서 어울렸고, 계곡 아래에서 올려다본 성곽은 정면이 아니라 바닥에서 시작되는 형식이었다.

룩셈부르크의 대표적인 아치형 석조교인 아돌프 다리는 20세기 초에 완공되어, 상징적인 도시 연결축 역할을 해왔다.

아돌프 다리를 건너던 순간, 옆으로는 트램이 지나가고, 아래로는 녹음이 진한 계곡이 시야를 채웠다. 

안내판에 적힌 정보보다, 이 다리를 걸으며 마주한 변화들이 더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다. 몇 걸음 사이에도 높낮이나 난간의 형태가 달라졌고, 걸어가는 방향에 따라 주변 풍경이 조금씩 바뀌었다. 특별히 어디에 멈추거나 시선을 고정하지 않았지만, 일정 구간을 지난 뒤에는 도시의 형태가 대략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룩셈부르크 시 중심부의 고지대에 위치한 헌법 광장은 전쟁 추모 기념물과 국기를 중심으로 설계된 전망 공간이다.

룩셈부르크 헌법 광장은 그 경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절벽 위에 설치된 넓은 공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계곡과 다리, 구시가지가 선형으로 이어진다. 바람이 불 때마다 국기가 움직였고, 그 아래로 도시는 낮은 지붕과 성벽, 산책로와 다층 교통망이 하나의 거대한 장면처럼 펼쳐졌다. 

구획별로 조명이 나뉘어 있지 않았고, 해가 기울기 시작할 즈음부터는 빛의 대비가 무척 부드러웠다. 도시를 인위적으로 연출하려는 흔적 없이, 거리 전체가 같은 속도로 밤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점차 빛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낮에 이미 걸었던 곳들이었지만, 저녁 무렵 광장과 거리 곳곳에 조명이 켜지면서 도심 전체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다리를 지나 도심 안쪽으로 걸어가자, 광장 주변에는 활기를 띤 사람들과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테라스가 놓인 식당 앞에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고, 몇몇 가게 창문 안쪽에서는 내부 조명이 인도처럼 길가를 밝히고 있었다.

한국과 룩셈부르크는 군사 외교를 계기로 형성된 관계를 행정과 산업 전반의 협력으로 확장해왔다. 도심 내 생활 공간과 공공 기능이 같은 거리 안에 놓인 배치에서는, 국가 규모에 비해 높은 행정 집중도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일정한 경로를 반복해 걷는 사이, 낮과 저녁의 조도나 인도와 차도의 간격, 광장 안에서 이어지는 통행의 속도 같은 것들이 거리마다 달리 느껴졌다. 나는 목적 없이 걷는 동안에 오히려 도시가 말해주는 기준을 읽게 되었고, 이 경험은 다음 도시에 대한 관점을 바꾸게 만들었다.

/ 글·사진 ⓒ 이정미, 한국콘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여행 인플루언서 ‘기장아내 나두트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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