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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수 한류이야기] 신주쿠 한 정거장 너머, 한류가 사는 골목

기사승인 : 2026-01-07 18:14 기자 : 편집부

신주쿠역에서 한 정거장만 이동해 신오쿠보역에 내리면 공기의 결이 조금 달라집니다. 일본어보다 한글 간판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골목마다 익숙한 K-팝 선율이 흘러나옵니다. 고기를 굽는 냄새와 김치의 발효 향, 한국식 디저트 카페에서 퍼져 나오는 달콤한 향이 겹쳐지며 이곳이 도쿄인지 서울의 어느 골목인지 잠시 헷갈리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 거리를 ‘일본 속 작은 한국’이라 부릅니다.

이 표현은 과장이 아닙니다. 일본 신주쿠구 상권 조사와 현지 언론에 따르면, 신오쿠보 일대에는 700곳이 넘는 한국 음식점과 관련 상점이 밀집해 있고, 주말이면 하루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거리를 찾습니다. 특정 국가의 문화와 음식이 이 정도 밀도로 한 도시에 자리 잡은 사례는 도쿄에서도 드뭅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신오쿠보를 “한류 소비가 관광 단계를 넘어 일상으로 정착한 지역”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곳은 이제 도쿄를 대표하는 한류 거리로 불립니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이곳이 관광지라기보다 생활 공간에 가깝다는 느낌이 먼저 듭니다. 주말이면 일본인뿐 아니라 한국, 동남아, 중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뒤섞여 음식점 앞에 줄을 섭니다. 각자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메뉴판 앞에서는 모두 같은 고민에 멈춥니다. “무엇을 먹을까.” 잠시 서 있기만 해도 서로 다른 일상이 한 골목으로 모여드는 장면이 만들어집니다. 이곳을 찾은 한국인들조차 “잠깐 한국에 와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신오쿠보의 매력은 ‘보는 한류’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김치 만들기 체험에서는 아이와 어른이 함께 배추에 양념을 버무리며 한국의 맛을 익히고, 한복을 빌려 사진을 남기는 가게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호떡과 떡볶이를 파는 작은 가게, 삼겹살집과 순두부 식당, 한국식 베이커리 카페가 이어지며 한류는 먹고, 만들고, 입어보는 경험으로 확장됩니다. 문화가 체험이 될 때, 기억은 자연스럽게 오래 남습니다.

이 변화는 수치로도 확인됩니다. 일본관광청에 따르면 도쿄를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가운데 약 20% 이상이 신오쿠보를 찾은 경험이 있으며, 특히 K-드라마와 K-팝을 접한 10~20대 여성의 방문 비중이 높게 나타납니다. KOTRA 도쿄무역관 역시 신오쿠보를 K-콘텐츠 소비가 외식과 소매 매출로 곧바로 이어지는 대표적인 상권으로 분석합니다.

향도 달라져, 한때 ‘삼겹살 거리’로 불리던 신오쿠보에는 최근 약과와 크림떡, 한국식 베이커리 카페 같은 디저트 매장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일본 농림수산성은 한국 음식이 일본 외식업에서 성장률 상위권을 기록하며, 젊은 세대의 일상적이고 트렌디한 소비로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한류가 특정 팬층의 취향을 넘어 일상 소비로 스며들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골목에서는 한국식 가게와 일본식 가게가 나란히 문을 엽니다. ‘스킨가든(Skin Garden)’ 같은 화장품 매장에서 한국 스킨케어 제품을 고른 뒤, 바로 옆 ‘IDOLPark나 K Star Plus’ 같은 K-팝 굿즈 숍에서 아이돌 앨범을 살펴보는 풍경도 낯설지 않습니다. 주말이면 일본 가족이 순두부찌개로 식사를 즐기는 모습도 자연스럽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가 이웃처럼 오가며 익숙해진 시간이 쌓인 결과일 것입니다.

물론 이곳의 과거는 늘 평온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신오쿠보는 한때 혐한(嫌韓) 집회가 반복되던 거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일본 사회 전반에서 K-컬처가 변방의 취미에서 주류 문화로 자리 잡았고, 혐오의 언어는 점점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지자체의 대응과 지역 사회의 노력이 더해지며, 이 거리는 갈등의 공간에서 공존을 시험하는 공간으로 방향을 바꿔 왔습니다.

외교 현장에서도 신오쿠보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주일한국대사관과 한국문화원 도쿄는 이곳을 민간 차원의 문화 교류 거점으로 바라봅니다. 공식 행사보다 먼저, 노래와 음식, 골목의 풍경이 국경을 넘었다는 점에서입니다.

돌이켜 보면 한류는 지난 칼럼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열린 한류 페스타’처럼 늘 이렇게 확장되어 왔습니다. 축제에서 시작된 관심이 식탁으로, 골목으로, 일상으로 이어지는 방식 말입니다. 오늘도 신오쿠보의 골목에서는 사람들이 김치를 담그고, 한복을 입어보고, K-팝을 흥얼거립니다. 갈등을 밀어낸 것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함께 먹고 만들고 배우며 쌓아 온 시간의 힘이었습니다.

이 골목은 조용히 묻고, 또 답합니다. 한류는 어디서 완성되는가. 한류는 화려한 무대 위가 아니라, 이렇게 한 도시의 생활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일상에서 완성된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한국 디저트를 사고, 아이돌 음악을 배경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이러한 반복된 경험이 쌓이면서 한류는 특별한 문화 체험이 아니라, 주말에 찾는 동네와 익숙한 선택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렇듯 신오쿠보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생활의 언어로서 한류가 사람과 사람을 잇는 풍경을 차분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위드온 글로벌 브릿지 하지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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