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승인 : 2025-12-30 12:51 기자 : 편집부
“자, 건배.” 이 한마디에 사람들은 잔을 들고, 표정이 풀리고, 어색함은 잠시 내려놓는다. ‘건배’란 말은 마를 건(乾), 잔 배(杯). 말 그대로 잔을 말리자, 다 마시자는 뜻이다. 요즘 말로 하면 아주 세련된 “원샷”이다. 생각해 보면 꽤 과감한 인사다. 서로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잔을 비우자는 제안이라니 말이다.

이 짧은 말은 한국에서만 쓰이지 않는다. 세계 어디를 가도 술자리에는 늘 각 나라의 ‘건배’가 있다. 베트남에선 이렇게 외친다. “못! 하이! 바! 요!” (하나, 둘, 셋, 마셔!) 혹은 “못 짬 퍼 짬!” (100%! 다 마시자!)
연말이 되면 한국에서도, 베트남에서도 이 짧은 한마디의 신호로 술자리가 시작된다. 한 해를 잘 버텨왔다는 안도감, 아직 끝나지 않은 관계에 대한 인사, 그런 것들이 모두 잔 안에 섞인다. 베트남에선 결혼식이든, 업무 마무리든, 축구 경기 승리든 이유는 달라도 술이 늘 중심에 있다.
베트남은 맥주 없이는 돌아가기 힘든 나라다. 2022년 일본의 한 맥주회사의 조사에 따르면, 베트남은 세계 맥주 소비량 9위로 21위인 한국보다 두 배 이상 많은 맥주를 마신다. 가격도 저렴하다. 전 세계에서 맥주가 가장 싸게 느껴지는 나라 중 하나다. 그러니 술자리에 맥주가 빠질 리 없다.
베트남의 맥주잔에는 예외 없이 얼음이 들어간다. 더운 날씨 탓에 맥주는 금세 미지근해진다. 처음엔 맛이 밍밍하게 느껴지지만 한여름의 하노이에서는 꽤 합리적인 선택이다. 더위를 이기기 위한 방식은 술잔 안에서도 드러난다.
술을 마시는 방식만큼이나 중요한 건 예절이다. 베트남 술자리에는 몇 가지 분명한 규칙이 있다. 술을 마신 뒤에는 반드시 악수를 한다. 특히 1:1로 마셨다면 악수는 더 중요하다. 이를 빼먹으면 ‘나와 마시기 싫었나?’ 라는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 또 하나, 술자리에서 한 말은 가볍지 않다. “다음에 밥 한 번 먹자”는 말은 베트남에서는 진짜 약속이다.
현지 친구와의 술자리에 익숙해지면서 자주 들은 말이 생각난다. “콩사이콩베(Không say không về)”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는 뜻이다. 농담같지만 이 말 안에는 베트남 술 문화의 핵심이 담겨 있다. 베트남에서 술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관계를 만드는 문화의 일부이다. 술자리에 앉았다는 건 이미 마음을 열겠다는 뜻이고, 함께 취해봤다는 건 그날부터 같은 편이 됐다는 신호다.
베트남의 술자리는 정해진 끝이 없다. 흐름에 가깝다. 잔이 비면 자연스럽게 채워지고, “한 잔 더”는 인사처럼 반복된다. 한국에서는 비교적 쉽게 “그만 마셔”라는 말이 나오지만, 베트남에서는 “왜 안 마셔?”가 먼저 나온다.
그래서일까. 한 번은 결혼식장에서 신랑과 장인이 너무 취해 부축을 받으며 나가는 모습도 보았고, 또 어떤 날은 현지 친구가 화장실 바닥에서 잠든 모습을 보며 외국인인 내가 오히려 그를 걱정하며 지켜보기도 했다. 특히 남자들 사이에서는 “술 잘 마시는 사람이 진짜 남자”라는 묘한 자부심도 있다. 술 부심이 있는 한국 사람이라면 베트남에서 의외로 상남자 대접을 받을지도 모른다.
다만 요즘은 조금 달라졌다. 2020년부터 베트남 정부는 술 문화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술 강요는 법적으로 금지됐고, 음주 운전엔 무관용 원칙이 적용된다. 학생, 공무원, 군인은 근무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음주할 경우 처벌 대상이다. 공원, 교육시설, 의료시설 등 다수의 공공장소도 음주 금지 구역으로 지정됐다.
술자리는 여전히 많다. 하지만 예전처럼 무작정 밀어붙이지는 않는다. 문화도, 사회도 조금씩 방향을 조정 중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이라는 말이 조금씩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마시지 않으면 실례’였던 문화 위에 이제는 ‘강요하지 않는 예의’가 덧붙여지는 중이다.
그래서 이 글이 술을 자제하자는 이야기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한국이든 베트남이든 술은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사람 사이의 벽을 먼저 허무는 도구이기도 하다. 다만 아이 키우는 아줌마가 된 지금의 나는, 더이상 술자리의 주인공처럼 마시지 못한다.
건배는 짧지만 술자리는 길어지는 연말. 한 해를 마무리하며 아줌마로서 가장 현실적인 건배사를 하려 한다. 취하려고 마시지 말고, 기억해야 할 사람과 마시자!
/글·사진 ⓒ 이주영, (전)sbs 미디어 비평 작가, (현)화성시 미디어센터 강사, 한국문학예술원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