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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향숙 여성교육] 바얀리한, 웃음으로 배우는 필리핀

기사승인 : 2025-12-23 12:38 기자 : 편집부

필리핀을 움직이는 단어 하나를 고르라면 ‘바얀리한(Bayanihan)’, 이보다 더 적확한 말은 없을 것이다. “이웃의 집을 함께 들어 옮겨준다”는 관습에서 온 이 말은, 그들의 교육철학이자 인생의 방식이다. 학교가 문을 닫아도, 교과서가 낡아도, 배움은 멈추지 않는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합창이다.

나는 다문화 봉사를 통해 여러 나라의 엄마들을 만났지만, 필리핀의 엄마들을 떠올리면 늘 웃음소리가 먼저 들린다. 태풍이 마을을 휩쓴 다음 날, 임시 대피소에서 기타를 치며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는 엄마들—그들의 웃음은 낙관이 아니라 배움의 기술이었다. 울지 않게, 두려워하지 않게, 아이들에게 ‘삶을 견디는 법’을 가르치는 수업. 그것이 바로 필리핀식 가정교육이다.

필리핀의 신앙은 엄숙한 의식보다 축제에 가깝다. 인구의 80%가 가톨릭이지만, 기도는 노래로 이어지고 축복은 춤으로 표현된다. 세부의 ‘시누락(Sinulog)’, 마닐라의 ‘신뇨 니뇨(Santo Niño)’ 행렬에서는 성상을 높이 든 사람들 뒤로 도시 전체가 흔들리며 “비바!”를 외친다. 아이들은 엄다의 손을 잡고 그 행렬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운다. 신앙은 고통을 숨기는 장막이 아니라, 견디는 법을 배우는 교실이다.

이 교실의 가장 중요한 교사는 바로 엄마다. 필리핀 여성의 교육 수준은 이미 남성을 추월했다. 여성의 중등·고등교육 진학률은 남성보다 10% 이상 높고, 도시 여성의 70% 이상이 대학을 졸업했다. 하지만 그 진보 뒤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교사로 살아가는 엄마들이 있다.

세계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팬데믹 시기 원격수업을 감독한 주체의 25%가 여성 가구주, 남성은 10%에 불과했다. 교육의 격차를 메운 것은 인터넷도, 정책도 아닌 여성의 손이었다. 그러나 그만큼의 돌봄 노동이 엄마들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필리핀의 사회 시스템을 지탱하는 힘은 국가가 아니라 가족이다. 가족은 혈연을 넘어선 안전망이고, 해외로 떠난 엄마들의 송금은 GDP의 9%를 차지한다. 누군가에겐 통계지만, 필리핀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랑의 회계’다. 해외근로자(OFW) 여성들이 낯선 땅에서 번 돈으로 아이들의 학비를 보내고, 그 돈은 다시 마을의 학교와 식탁을 지킨다. “공부해라,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 이 한마디가 세대를 잇는 교과서다.

하지만 교육평가위원회(EDCOM II)의 최근 보고서는 냉정하다. 10세 아동 중 9명 중 1명만이 읽기와 수리의 기초 능력을 갖췄다. 학습의 위기는 교실 밖, 곧 가정의 불평등에서 시작된다. 다자녀 가정일수록 한 아이의 학업 지속 가능성이 낮고, 시골 여성일수록 조기 노동이나 돌봄을 택한다는 연구도 있다. 가족의 크기와 구조가 교육 기회의 격차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필리핀의 엄마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실을 개조하기보다 노래로 녹인다. 경제위기 속에서도 웃는 가면을 쓰고 거리로 나선 ‘마스카라(MassKara) 축제’가 그 증거다. 절망을 웃음으로 바꾼 이 축제는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시민 선언이었다. 웃음은 가면이 아니라, 다시 살아보겠다는 약속이었다.

역사 속 여성들도 그 약속을 이어왔다. 가브리엘라 실랑(Gabriela Silang)은 말을 타고 스페인 식민군에 맞섰고, 코라손 아키노(Corazon Aquino)는 노란 리본과 묵주로 민주주의를 되살렸다. 그리고 마리아 레사(Maria Ressa)는 가짜뉴스의 파도 속에서 언론의 자유를 지켰다. 총 대신 펜으로, 묵주 대신 마이크로 싸운 그들의 용기는 ‘지식이 곧 용기’임을 증명했다.

오늘날 필리핀의 여성교육은 단지 ‘학교에 가는 일’이 아니라, 삶 전체를 가르치는 일이다. 엄마들은 아이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기 전에 감정의 언어, 연대의 문법을 먼저 가르친다. “힘들 때 웃는 법, 슬플 때 노래하는 법, 배고플 때 나누는 법.” 그것이 필리핀식 가정교육의 세 과목이다.

물론 웃음이 모든 상처를 덮을 수는 없다. 젠더 폭력, 이주 과정의 착취, 태풍이 남긴 불안한 삶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필리핀의 엄마들은 울음을 노래로 바꾸는 법을 안다. SNS에서는 ‘웃으며 배우는 엄마들(#MabuhayMoms)’ 캠페인이 퍼지고, 교구 여성단체들은 재난이 닥칠 때마다 아이들을 위한 ‘노래 학교(Song School)’를 연다. 웃음과 노래 속에서 가족은 함께 자라고, 배움은 개인의 성취를 넘어 공동의 생존력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필리핀의 진짜 교육은 성평등보다 더 넓은, ‘함께 배우는 문화’, 바로 바얀리한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해변의 저녁, 누군가 기타로 첫 코드를 울리면 사람들은 둥근 원을 그리며 앉아 이렇게 외친다. 
“마부하이!(Mabuhay —살아라, 그리고 웃어라)”

/ 글·사진 ⓒ 임향숙, 폭스포럼 대표, (사)지구보존운동연합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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