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승인 : 2025-12-18 13:00 기자 : 편집부
농촌을 떠올리면 흔히 사람이 떠난 마을, 불 꺼진 창문과 잠긴 문 앞에 쌓인 먼지다. 이탈리아 남부 바실리카타(Basilicata)도 한때 그런 이름으로 불렸다. ‘이탈리아의 잊힌 땅’. 그 중심 마을 그로톨레의 상주인구는 300명 남짓, 방치된 빈집은 600채를 넘었다. 청년은 하나둘 떠났고, 마을에 남은 것은 노인과 빈집뿐이었다.

그런데 이 쇠락의 풍경이 뜻밖의 출발점이 됐다. ‘원더 그로톨레(Wonder Grottole)’ 프로젝트다. 이곳은 빈집을 헐거나 매각하는 대신 외부 청년과 창작자를 3개월간 머무는 ‘체류자’로 초대했다. 에어비앤비와 협업한 ‘이탈리안 사바티컬’ 프로그램에는 전 세계에서 28만 명 이상이 지원했다. 이들은 정착을 강요받지도 않은 채 대신 골목을 쓸고, 빵을 굽고, 축제를 기획하며 마을의 일상이 됐다.
바실리카타의 핵심은 분명했다. 현금이 아니라 공간과 역할을 제공한 것이다. 청년은 소비자가 아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고, 빈집은 부동산이 아니라 경험의 무대로 바뀌었다. 불 꺼졌던 창문에 불이 켜졌다. 메시지는 명확하다. 청년을 붙잡으려 하지 말고, 먼저 머물게 하라.
이 이야기가 왜 지금 경남 거창군에서 중요할까. 지방소멸은 더 이상 추상이 아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경남 군 단위 지역 다수가 청년 순유출 상태이며, 농촌 지역의 20~39세 인구 비중은 10% 안팎에 머문다. 거창군 역시 전체 인구 약 6만 명, 20년 전보다 감소했고 청년 비중 역시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그럼에도 거창군이 주목받는 이유는, 이 현실을 인정한 상태에서 청년정책의 질문을 바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거창군은 2025년 국무조정실이 주관한 ‘청년친화도시’에 선정됐다. 농촌형 모델로는 이례적인 사례다. 군 계획에 따르면 5년간 약 10억 원 규모의 국비·지방비 연계 예산이 투입되며, 정책의 초점은 단기 일자리가 아니라 ▲청년 참여 기반 정책 설계 ▲정주 여건 개선 ▲지역 활동과 연결된 일·문화 구조에 맞춰져 있다.
거창 청년정책의 특징은 분명하다. “어떻게 데려올 것인가”보다 “어떤 역할을 맡길 것인가”에 가깝다. 청년 전용 공간, 청년 정책위원회, 농업·창업·문화 영역의 실험이 병행된다. 청년을 단순 수혜자가 아니라 정책 설계의 참여자로 놓았다는 점에서 기존 농촌 정책과 결이 다르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 생긴다. “거창은 청년에게 맡길 ‘이야기’를 갖고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사실 거창은 이미 풍부한 문화 자산을 쌓아온 지역이다. 거창국제연극제는 1989년 시작돼 30년 넘게 이어져 온 국내 대표 야외 연극 축제다. 최근 회차 기준 7개국 이상, 50여 개 극단, 70회 이상 공연, 관객 약 2만 명이 찾았다. 수승대 자연무대를 배경으로 ‘연극의 도시’라는 브랜드를 만들어왔다.
그러나 이 축제는 오랫동안 청년정책과 분리된 이벤트로 운영돼왔다. 축제는 열렸지만, 청년이 기획하고 운영하며 지역에 남는 구조는 약했다. 이제 거창군이 던져야 할 질문은 분명하다. 군 축제를 청년이 참여하는 일자리이자 창업 실험장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이다.
여기에 영승제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자산이 있다.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 설화를 기리는 이 축제는 『삼국유사』 서동요와 맞닿은 희소한 서사 자원이다. 규모는 작지만, 기록·아카이빙·교육·공연·콘텐츠로 확장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청년에게 ‘할 일’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이야기다.
반면 거창군이 조성해 온 산림레포츠파크, 감악산 화원단지, 창포원(약 42만㎡), 우두산 Y형 출렁다리(총연장 109m) 등은 수십억 원대 예산이 투입된 관광 인프라다. 하지만 대부분 관람·체험 중심으로 운영돼 청년 고용이나 정착과의 연결은 제한적이다. 문화체육관광부 통계에 따르면 농촌 관광시설 평균 체류시간은 2~3시간 내외다. 방문객은 늘어도, 사람은 남기기 어렵다.
이 대비는 우리에게 분명한 질문을 던진다. 시설은 늘었지만, 그만큼 청년의 역할도 늘었는가.
바실리카타가 보여준 답은 단순하다. 공간보다 먼저 사람의 역할을 설계하라는 것이다. 거창 청년정책의 다음 단계는 새로운 개발이 아니라, 기존의 축제·설화·공간을 청년의 일로 잇는 구조다. 이를 위해 실패를 허용하는 장치와 연중 프로젝트, 이를 연결할 중간 지원 조직이 필요하다.
청년정책의 핵심 질문은 “얼마를 지원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 지역에서 청년은 어떤 역할로 살아갈 수 있는가”에 있다. 정착이 쉽지 않다면, 먼저 청년이 지역의 콘텐츠와 일상에 자연스럽게 엮이도록 돕는 과정이 필요하다. 거창군의 방향은 분명 옳으며, 여기에 전략적인 청년 활동이 지역 자원과 어우러질 때 지속가능한 농촌의 모범 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다.
/ 한국문학예술원 강이석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