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승인 : 2025-12-12 13:44 기자 : 편집부
어느 날 현지 친구가 말했다. “겨울이 되면 한국 드라마 도깨비에서 눈 내리는 장면이 생각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한국의 겨울 장면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손바닥 위에 사뿐히 내려앉던 눈송이, 가족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던 아랫목의 온기. 하노이의 겨울엔 그런 순간이 없다.

하노이는 겨울이 되어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눈은 내릴 기미가 없고 비만 간간이 떨어져 하얗게 쌓이는 눈 풍경은 TV 속 장면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열대의 나라에서 패딩이 잘 팔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엔 웃고 넘겼다. 하지만 그 말은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현지인들은 겨울이지만 늦가을의 온도에도 목도리를 두르고, 발열 내의를 껴입고도 두꺼운 패딩으로 마무리한다. 처음엔 “저 정도까지 입는다고?” 싶던 내 모습도 며칠 지나지 않아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하노이에서의 첫겨울, 나는 그 추위를 오토바이 택시 뒤에서 가장 매섭게 체험했다. 10분만 달려도 손끝이 얼고, 속눈썹 사이로 찬 공기가 스며들었다. 한국의 11도는 “아, 가을이네” 하는 온도였지만 하노이의 11도는 “이러다 감기 걸리겠는데?” 하는 진심 그 자체였다.
하노이의 겨울에선 실제 기온보다 체감 온도가 5~7도 정도 낮게 느껴진다. 건조한 찬바람이 아닌 무거운 습기가 피부와 옷 사이에 머물면서 체온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방한 전략 없이 지낸다면 밤이슬을 맞은 것처럼 온몸이 으슬으슬해지면서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다.
열대 기후 특성상 집은 시원하게 지어져 있다. 바닥은 큼지막한 타일이나 대리석으로 깔려 있어 냉기를 품고 있고, 천장은 높아 따뜻한 공기는 위로만 떠다닌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12월부터 3월까지는 밖보다 집 안이 더 춥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 게다가 베트남 집들엔 한국식 온돌이 없다. 습한 나라에서 온돌은 옷장과 벽, 집안 이곳저곳을 곰팡이로 뒤덮이게 할 뿐이다. 여름엔 축복이던 집의 구조가 겨울엔 흠칫 놀랄 만큼 반전의 추위가 되어 돌아온다.
그래서 교민들의 겨울 생존 필수품 1위는 단연 전기장판이다. 하노이 이삿짐 추천 목록에는 늘 이 아이가 맨 위에 자리한다. 그렇다면 난방시스템은 전혀 없을까? 그건 아니다. 하노이의 에어컨은 히터 기능이 갖춰져 있지만 그 바람은 따뜻함보다 답답함이 앞선다. 따라서 아이가 있는 가정이라면 전기장판 외에, 난방 텐트까지 준비한다면 금상첨화다. 텐트 안은 금방 포근해지고, 바닥의 냉기는 막아주고, 히터의 텁텁한 공기까지 차단해주니 아이들이 감기에 걸릴 걱정을 훨씬 줄일 수 있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것이 제습기다. 하노이의 겨울은 습도가 높기 때문에 빨래를 건조시키려면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전기세가 무섭다는 이유 하나로 선풍기를 틀었다. 선풍기 바람은 시원함이 아니라 차갑고 눅눅한 공기를 그대로 순환시켰고 옷은 더 꿉꿉해졌다.
결국 현지에서 제습기를 구입해 하루 2~3번 돌리니 묵직하면서도 찬 공기가 건조해져 방의 체감 온도가 엄청 달라졌다. 그렇게 방 안의 눅눅함이 사라지니 공기도 갑자기 가벼워지고 마음도 조금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또한 두꺼운 아우터보다 중요한 건 몸에 딱 맞는 이너를 겹쳐 입는 게 겨울나기에 효과적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얇지만 밀도 있는 티셔츠와 레깅스를 매일 세트처럼 챙겨 입었다.
이상하게도 한국에선 겨울만 되면 괜히 들뜨고 설렜다. 하지만 회색의 계절 속에서 나는 조금
차분해지고, 해가 드문 날 떠오르는 햇빛 한 줄기 하나에도 괜히 더 감사해지는 마음이 생겼다. 하노이의 겨울은 내가 꿈꾸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 계절을 지내는 동안 나는 조금 단단해지고 조금 여유로워졌다.
그러나 거주자가 아닌 여행자를 위한 작은 조언이 하나 있다. 혹시나 겨울의 하노이를 계획하고 있다면 말리고 싶다. 하노이의 진짜 매력은 봄(4~5월)과 가을(9~11월)에 느낄 수 있으니, 겨울엔 조금 더 따뜻한 중부나 남쪽 도시인 다낭, 호이안, 호찌민 쪽이 훨씬 행복할 거라고 말이다.
/ 글·사진 ⓒ 이주영, (전)sbs 미디어 비평 작가, (현)화성시 미디어센터 강사, 한국문학예술원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