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승인 : 2025-11-27 13:24 기자 : 편집부
파리의 겨울 공기는 언제나 부드럽습니다. 와인잔의 온기와 녹아내리는 버터의 향 사이로, 요즘은 익숙한 기운이 은근히 스며듭니다. 김치의 산뜻함, 고추장의 달큰한 매운맛, 장(醬)이 지닌 깊은 발효의 향기…. 어느새 이 모든 것이 파리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습니다. 그 변화를 마주할 때면, 오래된 친구가 멀리서 건네는 따뜻한 손짓 같아 마음이 따듯해지곤 합니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Le Monde, 2023)가 “K-푸드가 프랑스를 정복하고 있다”고 전한 것도 이제는 낯설지 않습니다. 실제로 농림축산식품부 자료에 따르면 파리의 한식당은 2020년 125곳에서 2022년 200곳 가까이로 늘어났고, 코리아헤럴드는 그 손님 중 70% 이상이 프랑스 현지인이라고 말합니다. 외국 음식점이 아닌, ‘동네 비스트로’처럼 자리 잡아가는 모습이죠.
그 변화의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K-비스트로(K-Bistro)입니다. 비스트로 특유의 편안함에 한국의 발효, 나눔의 미학이 조용히 녹아든 형태. 전통 한식당이 아니라 프랑스 조리 기법 위에 한국적 풍미를 얹어, 둘의 감각을 균형 있게 이어주는 새로운 미식 장르입니다. 11구의 대표적인 K-비스트로인 ‘Pierre Sang in Oberkampf’처럼 비빔밥을 불고기·훈제 연어·커리 등으로 재해석하거나 김치 파전과 크로크 김치-체다 같은 메뉴를 비스트로 방식으로 구성하는 곳도 늘고 있습니다.
파리·일드프랑스에서 열린 K-Food Week 2025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프랑스 레스토랑 13곳이 고추장 글레이즈, 감태 버터, 간장·대파 소스처럼 한국식 장(醬)과 발효의 기법을 자신들의 언어로 재해석해 메뉴를 내놓았습니다. 바게트 위에 감태 버터를 얹은 작은 타파스는 바다 냄새를 닮은 한국의 감성과 프랑스의 바삭한 일상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고, 오븐에 천천히 구워낸 문어 위에 얹힌 고추장 글레이즈는 매콤함 아래에 깃든 단맛으로 파리지앵들의 감각을 끌어당겼습니다.
전통적인 무거운 소스 대신 신선한 재료의 맛과 간결한 조리법, 그리고 창의성을 중시하는 흐름도 파리에서 한국 음식이 주목받는 배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요즘의 젊은 소비자들은 단순히 맛뿐 아니라, 그 음식이 어떤 이야기와 사유를 담고 있는지에 관심을 둡니다. 발효와 장이 품은 시간의 깊이, 고유한 풍미는 이러한 요구와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어 프랑스 미식에 익숙한 세대에게도 새로운 감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학술 연구 역시 이를 뒷받침합니다. 한국 발효 소스의 서양요리 적용 연구(EASDL, 2022)는 고추장·된장이 프렌치 요리에서 중요한 우아미와 풍미의 깊이를 강화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장의 스토리 ‘시간, 자연, 인내’는 프랑스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가치와도 닿아 있습니다. 외식 소비 전문기관 Food Service Vision(2024)도 20~30대 프랑스 소비자들이 음식 선택 시 ‘스토리·철학·문화적 맥락’을 중시한다고 분석했습니다. 발효와 장, 나눔의 상징성을 품은 한국 음식은 그 요구를 정확하게 충족하고 있습니다.
파리 11구와 3구는 이러한 K-비스트로 감성이 가장 활발히 피어나는 지역입니다. 와인바와 작은 비스트로들이 모여 있는 골목에서는 요즘 ‘한국식 감각’을 입은 요리들이 하나둘 등장합니다. 바삭하게 구운 파전과 소비뇽 블랑을 함께 즐기는 조합은 이미 현지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얇게 부친 한국의 김치전은 K-비스트로 메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K-푸드는 이제 파리를 넘어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리옹에서 열린 ‘K-푸드 페어’에서는 29개 한국 기업이 참여해 55개 유럽 바이어와 상담을 진행하며 산업적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연 4~5만 명이 찾는 ‘리옹 스트리트푸드 페스티벌’에서는 한국이 올해 포커스 국가 중 하나로 선정되면서, 한국 음식이 주요 콘텐츠로 소개되었습니다. 대상 유럽법인이 떡볶이와 김치 요리를 활용한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하는 등 현장 곳곳에서 한식 팝업이 운영되었고, K-푸드 부스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선 모습이 여러 차례 포착되었습니다.
세계 최대 식품 박람회인 ‘SIAL Paris 2024’에서는 한국이 처음으로 독립관을 구성해 참가했고, 샘표의 ‘완두간장’, 매일유업의 ‘얼려먹는 식혜·수정과’ 같은 발효 기반 혁신 제품들이 유럽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국 음식이 단순 ‘트렌드’가 아니라, 지속가능성과 창의성을 갖춘 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파리에서는 새로운 음식이 실제 식탁 위로 빠르게 흡수되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비스트로 창가에서 파전을 주문한 프랑스 가족, 테린에 간장을 더해 풍미를 조절하는 셰프, 와인바에서 김치 버터를 곁들이는 손님들처럼, 한국적 맛이 이 도시의 일상적인 외식 장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들은 한국과 프랑스의 미감이 한 도시의 외식 문화 안에서 동시에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K-비스트로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프랑스 미식이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되는 지점을 조용히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 위드온 글로벌 브릿지 하지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