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승인 : 2025-11-26 13:04 기자 : 편집부
호주의 남쪽은 그 어느 대륙보다 길고 조용하다. 대양과 맞닿은 해안선을 따라 바람은 말없이 결을 바꾸고, 풍경은 소리 없이 페이지를 넘기듯 펼쳐진다. 멜버른에서 차를 몰아 그레이트오션로드(Great Ocean Road)를 향하던 아침, 해가 막 떠오를 무렵 카페에서 들고 나온 커피의 따뜻함이 손끝에 오래 남았다. 카페 주인인 노신사가 내게 물었다.

“처음 가세요? 이곳은 운전자가 아니라 풍경이 이끄는 길이에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았다. 마치 길 자체가 목적지가 될 거라는 힌트처럼.
243km의 구간을 달리다 보면 바다와 절벽, 숲과 곶이 끝없이 교차한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돌아온 군인들이 직접 건설하며 ‘기억의 길’이 된 이곳은 지금도 여행자들에게 새로운 기억을 선물한다. 군인들의 이름이 새겨진 표지판을 스쳐 지나갈 때면 길 위의 바람이 조금 더 묵직하게 느껴졌다.
■ 침식의 시간 앞에 선 풍경, 12사도 바위
가장 먼저 나를 멈춰 세운 건 12사도 바위(The Twelve Apostles)였다. 수평선 위에 기묘하게 솟아오른 석회암 기둥들은 마치 바다 위에서 기도하는 이들의 뒷모습 같았다. 바람은 거칠고 차가웠지만, 바다는 묵묵히 깊었다. 그 광경을 사진 찍던 젊은 여행객 중 한 명이 말했다.
“저 바위들, 처음엔 12개였대. 지금은 몇 개만 남았지만.”
그의 말투는 어느새 작은 위로처럼 들렸다. 완전함이 전부는 아니라는 듯. 형태는 사라져도 의미는 오래 남는다는 걸 바위들이 조용히 알려주는 듯했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풍경 속에 서 있었다.
■ 고요한 비극, 로크아드 협곡에서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자 로크아드 협곡(Loch Ard Gorge)이 나타났다. ‘Loch Ard’호의 비극에서 유래한 이름임을 알고 있었지만, 풍경은 지나치게 고요하고 부드러웠다. 노란 절벽에 햇살이 부드럽게 흐르고, 잔잔한 물결은 조용히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현지 여성 클레어는 조심스레 말했다.
“사람들은 비극을 떠올리지만, 난 여길 ‘두 번째 기회’의 장소라고 불러요. 살아남은 두 사람이 여기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했거든요.”
비통했던 기억도 시간이 내려앉으면 다른 서사를 품는다는 사실. 자연은 그렇게 사람의 상처 위에 또 다른 계절을 덧칠하고 있었다.
■ 이어지지 않아도 남는 풍경, 런던 브릿지
일정의 마지막에 마주한 런던 브릿지(London Bridge)는 이름부터 낯설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육지와 연결된 아치형 다리였지만 일부가 무너져 지금은 바다 위에 홀로 남은 바위 하나만 그 자리에 서 있다. 전망대에서 사진을 찍던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처음 여기 무너졌을 때 다들 ‘설마’ 했대요. 그런데 그 이후의 모습이 오히려 더 멋지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함이 강렬함을 만드는 건 아니었다. 형태가 끊겼는데도 오히려 마음은 더 단단해졌다. 조금 불완전하기에 더 오래 바라보고 싶은 풍경도 있었다.
여행은 늘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다가온다. 가끔은 무너진 계획이 더 좋은 길을 만들고, 예상 밖의 풍경이 마음속에 오래 남기도 한다. 이곳에서 바라본 바다는 형태보다 ‘흐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조용히 알려주었다. 돌이킬 수 없던 시간들, 그럼에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어가야 했던 계절이 문득 떠올랐다.
그레이트오션로드를 지나며 다시 생각했다. 여행은 가보지 않은 곳을 보는 일이면서, 이미 지나온 것의 의미를 다시 정리하는 시간이다.
절벽, 협곡, 바다 위 바위 하나하나까지 모두 다른 온도와 방식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호주의 남쪽 해안은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삶을 다시 정렬하게 만드는 힘이 담겨 있었다.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고, 시간이 걸려도 결국 남는 것이 있다는 메시지. 그레이트오션로드는 그런 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전망대에서 만난 한 여행객이 내게 남긴 말이 여정을 마무리했다.
“오늘 본 풍경은 내일 다시 보면 또 달라져 있어요. 바람이 바꾸고, 내가 바뀌니까요.”
여행은 새로운 곳을 보는 일이자, 지나온 시간을 다시 바라보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이 길 위에서 다시 느끼게 되었다.
/ 글·사진 ⓒ 이정미, 한국콘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여행 인플루언서 ‘기장아내 나두트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