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승인 : 2025-11-06 13:32 기자 : 편집부
영국 웨일스 국경의 소도시 헤이온와이(Hay-on-Wye)는 인구 1,675명의 전형적 지방소멸 위기 지역이었지만, 1961년 서점가 리처드 부스가 헌책방을 열며 시작한 ‘북타운(Book Town)’ 실험이 도시의 운명을 바꿨다. 1970년대 말 30여 개의 서점이 들어섰고, 1987년 시작된 헤이 페스티벌은 매년 20만 명 이상을 끌어들이며 지역 고용의 40%를 문화·관광 산업이 차지하게 만들었다. 청년 창업률은 인근 농촌의 2배로 늘었고, 마을은 지식과 창의의 생태계로 재편되었다. 이 사례는 청년 중심의 문화전략이야말로 지방소멸을 되돌릴 수 있는 핵심 해법임을 보여준다.

◆ 전라북도 남원시 – “지리산 책방마을 프로젝트”
전북 남원시는 한때 춘향과 흥부, 판소리의 고향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지방소멸위기 1단계 지역으로 지정된 대표 농촌도시다. 1960년대 인구가 18만 명에 달했으나 현재 7만 5천 명으로 60% 이상 감소했다. 청년층(19~34세)은 12%에 불과하고, 고령층은 31%로 인구 불균형이 심각하다. 이에 남원시는 2022~2025년 지방소멸대응기금 총 412억 원을 확보했으며, 이 기금을 바탕으로 추진 중인 ‘지리산 활력타운 조성사업’은 정주여건 개선과 청년 유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사업에 헤이온와이의 북타운 모델을 접목한 ‘지리산 책방마을 프로젝트’를 도입한다면, 남원은 문화와 청년이 공존하는 새로운 문학생태도시로 거듭날 수 있다. 구도심의 빈 점포와 한옥을 리모델링해 독립서점·북카페·창작공방·북스테이 숙소를 만들고, 매년 ‘지리산 인문책 축제’를 개최하는 것이다. 이미 혼불문학관·춘향제·남원예촌 등 연간 4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 문화 인프라가 탄탄하다.
핵심은 단순한 보조금이 아니라 문화기반 일자리 창출이다. 북큐레이터, 출판디자이너, 북콘텐츠 기획자 등 청년 창의직업을 육성하고, 남원이 추진 중인 ‘천연물 바이오소재 생태환경사업’의 창업지원 경험을 문화창업으로 확장하면 지식·예술·생태가 융합된 신경제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책은 마음의 산”이라는 슬로건 아래, 남원이 청년이 머물고 일하며 배우는 문학생태도시로 도약할 때, 문화는 곧 경제가 되고 책은 미래 산업이 된다.
◆ 강원도 태백시 – “지식광산 리빌딩 프로젝트”
한때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끈 석탄도시 태백은 지금 지방소멸위험지수 전국 5위로 분류된 폐광도시다.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이후 산업 기반이 무너지면서 인구는 12만 명에서 현재 3만 6천 명으로 70% 이상 줄었다. 청년층은 13%에 불과하고, 출생(316명) 대비 사망(1,333명)의 자연감소율이 전국 최악 수준이다. 산업 전환의 지연과 생활 인프라 약화로 청년 유출과 고령화가 동시에 진행된 결과다.
하지만 태백은 여전히 산업유산과 문화자산이 공존하는 ‘기억의 도시’다. 탄광역사촌, 폐갱도, 광부 사택촌 등 과거 산업의 흔적은 이제 문화창조의 자원이 될 수 있다. 이를 기반으로 한 ‘지식광산 리빌딩 프로젝트(Book Mine Project)’는 폐광시설과 사택촌을 리모델링해 책·예술·기술이 융합된 청년 창작기지로 전환하는 구상이다. 버려진 갱도는 ‘문학터널’, 사택촌은 ‘서점 레지던시’로 재생해, 광산의 기억을 콘텐츠로 변환하는 ‘기억산업’을 구축하는 것이다.
태백시는 2024년 도시재생뉴딜사업과 지역활력타운 조성사업에 선정되어, 청년을 위한 창업 공간과 문화 복합시설을 만들고 있다. 여기에 북튜브·오디오북·지역 기록 플랫폼을 함께 운영하는 ‘지식광산 스타트업 허브’를 조성하면, 청년들이 태백에서 머물며 일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생긴다. 이렇게 과거의 탄광산업을 ‘기억과 문화의 산업’으로 바꾸면, 태백은 산업이 아닌 문화로 다시 살아나는 도시, 즉 한국형 문화재생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지방 소멸도시에 던지는 시사점
영국의 작은 마을 헤이온와는 지방의 소멸도시에 불과했지만, ‘책 한 권’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폐허나 다름없던 마을이 한 개인의 상상력으로 ‘세계 최초의 책마을’이 되었고, 매년 20만 명이 찾는 헤이 페스티벌을 통해 도시 GDP의 4분의 1을 벌어들이는 문화경제의 기적을 만들었다. 핵심은 산업이 아니라 청년과 문화의 결합, 그리고 상상력이었다.
이 사례는 한국의 작은 소멸도시에도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청년이 떠나는 이유는 일자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머물고 싶은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지역이 가진 이야기와 감성을 바탕으로, 청년이 직접 기획하고 창업하며 문화를 만드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문화가 일자리가 되고, 창의가 경제가 되는 순간, 작은 도시도 세계와 연결된다. 결국 지방소멸의 해법은 ‘사람을 붙잡는 정책’이 아니라 사람이 머물고 싶어지는 도시를 만드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작은 도시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길, 그리고 대한민국 지역의 새로운 르네상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