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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미 세계여행] 스페인, 나와 닮은 도시를 걷다

기사승인 : 2025-11-03 13:30 기자 : 편집부

스페인은 도시마다 결이 다르다. 이 나라는 뚜렷한 지역색과 감정을 가진 도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북부에서 남부까지 도시마다 문화도 다르고, 건축의 곡선도 다르며, 빛과 사람의 결도 달라진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스페인에서는 여행지가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 거울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스페인을 여행하는 이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나는 어떤 감정에 머물러 있으며, 여행지에서는 그 감정을 어떻게 마주하고 싶은지를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사람마다 여행에서 기대하는 바는 다르다. 누군가는 미술관과 건축물에서 감정을 얻고, 누군가는 골목의 공기나 바다의 침묵에서 위안을 받는다. 또 어떤 이들은 새로운 자연 환경이나 구조적인 도시에서 자극을 얻고, 조용한 소도시에서 혼자만의 리듬을 찾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개인의 여행 성향은 도시에 대한 인상을 완전히 달라지게 만든다.

나 역시 그러했다.

스페인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점차 목적지보다 ‘내가 그곳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며 보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에나에서 하루 종일 유명한 명소를 찾아다녔지만, 결국 가장 또렷하게 기억에 남은 건, 산지미냐노 숙소 근처의 조용한 골목과 그 숙소 테라스에서 아침을 먹으며 마주했던 도시 전경, 햇살, 그리고 내게 아침 식사와 함께 따스한 말을 건넸던 중년 여성 직원이었다.

스페인은 도시마다 다른 결을 지녔고, 여행자의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바르셀로나 – 감정이 머무는 곡선, 바르셀로나는 예술의 결이 일상에 스며 있는 도시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앞에 섰던 그날의 감정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수많은 도시에서 성당을 보았지만, 이토록 압도적인 감정을 안겨준 건 처음이었다. 빛이 천장을 타고 내려와 공간을 물들이는 그 순간, 나는 말없이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구엘 공원을 걷던 오후, 햇살을 머금은 조형물들이 색을 달리했고, 그 곡선 위로는 가우디의 상상력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가우디의 건축은 예술의 곡선이라기보다 생명의 숨결에 가까웠고, 도시 전체가 감탄이 아니라 응시를 필요로 한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감정이 고요히 머무는 공간,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바르셀로나였다.

마드리드 – 나의 여정이 시작된 자리, 마드리드는 모든 길의 시작점이었다.

나는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서 ‘0킬로미터 지점’에 발을 올렸다.

“스페인의 모든 길이 시작되는 자리에서, 이 여정도 나만의 출발선을 하나 그었다.” 지도 위의 여행이 아니라, 감정의 시작점이었다.

그라나다 – 침묵 속에서 감정을 마주한 도시, 그라나다는 나를 조용히 멈춰 세운 도시였다.

알함브라 궁전의 무늬나 전망대에서 본 풍경보다, 가장 깊게 남아 있는 기억은 나스리 궁전과  정원에서의 오랜 머묾이었다.

햇살 아래 벤치에 앉아 문양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문득 눈을 감았을 때, 내 안에서도 모든 소리가 잠잠해졌다. 물을 가르며 흐르는 소리,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 그 두 가지가 겹쳐지는 순간이 유일한 배경음이었다.

세비야 – 울림이 남는 도시, 세비야에서는 처음부터 마음이 흔들렸다. 거리 곳곳에서 플라멩코 공연이 펼쳐졌고, 그 발끝의 박동과 노래의 열정 속에서 그들의 삶이 가진 강렬한 의지가 전해졌다.

걸음을 멈춘 사람들 사이에 나도 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가 터져 나왔고, 그 순간의 리듬이 이 도시의 심장처럼 느껴졌다.

“지금 이건 무대가 아니라, 삶이 울리는 거구나.”

세비야의 밤공기는 도시의 조명보다 오래, 감정의 떨림으로 내 안에 남았다.

톨레도 – 달콤한 기억이 머무는 도시, 톨레도의 골목을 걷다가, 남편이 조용히 이끌어준 작은 카페가 있었다. 이곳은 수녀님들이 직접 만든 수제 츄러스를 정성스럽게 이어가는 단정한 작은 카페였다.

달콤하고 바삭한 츄러스. 세상 어디서든 만날 수 있을 법한 메뉴인데, “수녀님들의 손맛”이라는 설명을 듣는 순간, 그 한 입에 대한 감정과 의미가 더해진다. 

여행은 나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놓는다. 스페인의 도시들을 여행하는 동안 나는 그곳에서 어떻게 머무는지를 배우기보다, 지금의 나에게 맞는 장소에서 자연스럽게 머무는 법을 알게 되었다. 도시마다 풍경은 달랐지만, 결국 내가 마주한 것은 당시의 나와 조화를 이루는 방식이었다.

한국에서도 계절이 바뀌는 어느 오후, 좁은 골목의 햇살이나 낡은 담장의 결에서 나는 스페인에서 경험한 그 조용한 일치감을 문득 떠올리곤 한다. 스페인이 내게 그랬듯,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거리 또한 누군가에게는 자기 결에 맞는 공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다음 여행을 앞두고 있다면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먼저 던져보자.

“나는 지금, 어떤 도시에서 가장 나다울 수 있을까.”

글·사진 ⓒ 이정미, 한국콘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여행 인플루언서 ‘기장아내 나두트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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