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승인 : 2025-09-15 12:42 기자 : 편집부
“야, 오늘 저녁은 H-마트 김밥 어때?”

토론토의 어느 대학 기숙사 앞, 주말 오후의 대화는 이처럼 가볍게 흘러갑니다. 그런데 이 짧은 말 속에 오늘날 한류의 현주소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겁니다. H-Mart는 이제 단순한 마트가 아니라, 작은 한국이며 동시에 세대를 이어주는 창이 되었습니다.
H-Mart의 뿌리는 미국입니다. 1982년 뉴욕 퀸즈에서 시작된 작은 한인 마트는 당시 이민자들에게 김치와 고추장을 사는 유일한 통로였고, 고국의 맛을 붙잡는 생명줄이었습니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 북미 전역 100곳이 넘는 매장으로 성장했지요. 그 의미를 세계에 각인시킨 사례가 있습니다. 인디 밴드 ‘Japanese Breakfast’의 보컬 미셸 자우너는 회고록 『H마트에서 울다』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H-Mart에 갈 때마다 울곤 한다. 엄마가 사주던 두부와 늘 쓰던 국수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짧지만 강렬한 이 문장은 전 세계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책은 60주 넘게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습니다. 한 마트가 누군가에게는 정체성의 거울이자, 누군가에게는 엄마의 기억을 되살리는 장소가 된 셈입니다.
캐나다에 첫 H-Mart가 들어선 건 2003년 밴쿠버였습니다. 이후 토론토, 캘거리, 에드먼턴, 몬트리올까지 뻗어 나가 교민 사회의 생활 기반이자 현지 청년들이 한국 문화를 가장 쉽게 체험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주말 오후 토론토의 H-Mart는 그야말로 북적입니다. 쇼핑 카트마다 라면과 김밥 재료, 한국 과자가 쌓여가고, 계산대 앞에서는 “이거 소주 맞지? 드라마에서 봤어!”라며 친구에게 묻는 대학생들이 줄을 섭니다. 장보기가 어느새 드라마 속 장면을 따라 하는 문화 체험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넷플릭스 화제작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주인공 루미가 김밥을 통째로 베어 먹는 장면이 SNS 밈으로 퍼진 뒤, 실제로 H-Mart 김밥 코너에서 “나도 루미처럼 한입 간다!”라며 사진을 찍는 청년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웃음과 셔터 소리가 뒤섞인 그 찰나, 문화는 더 이상 스크린 속 이야기가 아니라 생활의 일부가 됩니다.
블랙핑크 제니가 미국 <제니퍼 허드슨 쇼>에서 새우깡과 바나나킥을 “최애 과자”로 소개하자 과자 코너는 금세 붐볐고, BTS 지민과 블랙핑크 리사의 ‘불닭볶음면 챌린지’는 H-Mart 매대를 거점 삼아 전 세계로 확산됐습니다. 단순한 식재료가 글로벌 팬덤의 ‘체험 키트’로 변신한 순간들이지요.
흥미로운 건 H-Mart가 이제 마트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부 지점엔 뚜레쥬르, BBQ치킨, 카페베네 등이 함께 들어서 작은 코리아타운 같은 풍경을 만듭니다. 쇼핑을 마친 사람들이 갓 구운 빵과 치킨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그 자체로 ‘일상 속 한류’의 장면입니다.
캐나다 교민은 약 24만 명, H-Mart는 이들에게 고향의 맛을 지켜주는 터전일 뿐 아니라, 현지 청년에게 한국 문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하게 하는 창구가 됩니다. SNS에서는 그 흐름이 더욱 선명합니다. #HMartHaul 해시태그 아래 자신이 산 라면과 과자를 보여주는 영상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불닭볶음면을 처음 맛본 청년이 “오 마이 갓, 너무 매워! 근데 맛있어!”라며 눈물을 글썽이는 장면은 단순한 체험기를 넘어 다음 방문자를 부르는 초대장이 됩니다.
도시의 풍경도 바뀌고 있습니다. 토론토 노스요크는 H-Mart 입점으로 코리아타운 상권이 확장됐고, 밴쿠버 ‘노스 로드 K타운’은 한남슈퍼와 한식당, K-뷰티 숍이 모여 하루 코스로 즐기는 K-컬처 거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축제의 힘까지 더해지며 무대에서 K-팝이 흐르면 10·20대 청년들이 “노래 나온다, 가자!” 하며 거리로 뛰쳐나와 관람자가 아닌 참여자가 됩니다.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 조사에서도 캐나다는 한국 문화콘텐츠 브랜드 파워가 가장 높은 국가로 꼽히며, K-팝 호감이 음식·뷰티 소비로 이어지며 문화가 곧 수출 동력이 되는 흐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생활 속 경험은 곧 지표로도 이어집니다. 한국 농림축산식품부 집계에 따르면 2024년 K-푸드 캐나다 수출은 130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으며(라면·간편식·김·가공밥이 견인), 북미권 H-Mart 같은 대형 유통망이 그 성장의 견인차로 작동했습니다. 이처럼 한류가 단발성 ‘열풍’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경제 생태계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돌아보면 H-Mart는 세대마다 다른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이민 1세대에게는 고향의 기억이고, 2세대에겐 부모와 연결되는 정체성의 거울이며, 현지 청년에게는 친구와 함께 웃고 떠드는 새로운 놀이터입니다. 같은 공간이지만 세대와 배경에 따라 다른 층위의 감정이 쌓입니다. 그것이 H-Mart의 힘입니다.
“이 라면 진짜 맛있어. 다음엔 떡볶이도 같이 해 먹자.”
친구들 사이의 이 짧은 대화 속에 한류의 내일이 숨어 있습니다. 토론토의 작은 한국, 세대를 잇고 문화를 이어주는 가장 따뜻한 놀이터로서 말입니다.
/위드온 글로벌 브릿지 하지수 대표